"......" 


미도리마가 슈토쿠에 들어온 뒤 6개월이 흘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자신의 체질이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미도리마는, 못 본 사이 훨씬 길고 여성스러워진 마코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타카오와 농구화를 사러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이었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그와 타카오 사이에서 농구를 뺀다면 주말에 사적인 용무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카오 녀석은 쓸데없이 붙임성이 좋았으니 테이코 때의 아오미네와 마코토의 사이보다는 조금 나은, 등하교 인사를 나누거나 타카오 쪽에서 시덥잖은 농을 걸어오는 사이겠지. 하지만 그 정도였다. 미도리마의 인간관계는 테이코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구라는 활동을 걷어내고 나면 이다지도 얄팍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도. 미도리마는 허탈감을 애써 떨쳐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도리마 신타로와 미도리마 마코토. 

두 개의 세상을 오가는 삶이 익숙해진 그에게 상식이란 것은 무척 힘든 개념이었다. 자신의 일상이 타인의 비일상이며, 자신의 평범이 타인의 비범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우치게 된 후 언제나 그를 괴롭히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의 모든 삶이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미도리마는 그의 마음 속 비밀기지인 다락방을 찾곤 했다. 볕이 잘 들지 않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창고로 쓰던 다락은 미도리마의 럭키아이템이 차곡차곡 쌓이며 작은 신전이 되었다. 


"...윽." 


어제까지만 해도 편하게 손이 닿았던 곳이 너무나도 높았다. 6개월 사이 마코토와 신타로의 신장 차이는 더욱 벌어진 모양이었다. 미도리마는 작은 상자를 발판으로 딛고서야 색이 바랜 토끼 귀가 삐죽하니 솟아 있는 상자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연한 주황색을 띤 골판지 상자 안에는 마코토가 사용한 럭키아이템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곳만큼은, 정확히는 이곳에 있는 럭키아이템만큼은 신타로와 마코토의 것이 공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신타로의 럭키아이템 창고에서 마코토가 구한 럭키아이템을 발견한 후, 그는 마코토로서의 삶이 실존했다는 증거로서 일기나 사진 같은 걸 남겨보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 남을 수 있는 건 오직 마코토가 산 그날의 럭키아이템뿐이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들어온 타인은 타카오뿐이었다. 몇 주 전 역사 숙제를 보여달라며 막무가내로 미도리마 가에 쳐들어온 그는, 미도리마의 '인사를 다 해서 스스로 하라는 것이다'라는 완강한 거부에 부딪쳐 치사해 신쨩-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는 곧 숙제는 포기한 것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도리마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집 진짜 넓네. 막 신쨩 방만 세 개 있다든가? 

-타카오, 숙제에 집중하도록. 그리고 두 개라는 것이다. 

-푸핫! 역시 하난 아니었던 거잖아! 여동생까지 있으면서 자기 방이 두개라니 럭셔리하네~ 혹시 하난 럭키아이템 방이라든가... 

-...... 

-...진짜? 지인짜? 


타카오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미도리마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가 알 바가 아니라는 거다. 

-흐응, 그래~? 


타카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2층 구석방은 핑크색 문패가 붙어 있었으니 동생 방일거고. 

-앉으라는 것이다, 타카오. 

-1층은 서재랑 안방이었지? 

-그건 또 언제 봤냐는 게야. 

-호크아이를 얕보지 말라구? 아까 보니까 화장실 옆에 올라가는 계단 있던데, 다락방일까나? 

-애초에 왜 남의 방을 보고 싶어하는... 

-오케이! 목표는 3층, 신쨩의 럭키아이템 창고! 타카오 카즈나리, 출격! 

-...타카오오오!! 


미도리마는 문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간 타카오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가 계단을 채 올라가기도 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타카오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는 머리를 짚으며 다락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카오는 쌓아올린 럭키아이템 사이를 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오, 이건 입학식날 가져왔던 곰인형이네? 이건 전에 카이조 전에 가지고 왔던 거고. 푸힛, 이건 또 뭐야?! 

-아프리카에서 공수한 얼룩말 조각이라는 게야. 

-이걸 구하려고 아프리카까지 간 거야?! 

-선후관계가 틀렸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의료봉사에 따라갔다가... 

-잠깐, 이 원숭이...완전 웃기게 생겼어...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란 것이다! 


몸을 떨어가며 웃던 타카오는 좀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분명 저 안쪽에는...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가볍게 제지했다. 


-타카오, 그쪽엔 깨지는 물건들이 많다는 거다. 

-괜찮아괜찮아~ 조심하고 있다구.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던 타카오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혔다. 미도리마는 불안한 예감에 손을 뻗어 그를 살짝 잡아당겼으나, 이미 늦었다. 


-우와 신쨩...이런 것도 럭키아이템이야? 

-...! 내놓으란 것이다! 


타카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화려한 속옷이 럭키아이템이었던 날 마코토가 직접 착용했던 브래지어와 팬티였다. 미도리마는 당황해서 그의 손에서 속옷을 낚아챘다. 타카오는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거의 울 기세로 꺽꺽거리며 웃고 있었다. 


-푸히히, 그게, 그렇잖아, 으하하하, 신쨩이 저 속옷을, 막 고르고 계산하고, 히힉 

-그만 웃으라는 것이다! 

-설마, 진짜 입지는... 풉, 않았겠지? 


미도리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닥치라는 것이다, 타카오!! 

-하아...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웃음을 겨우 그친 타카오는 숨을 고르며 '마코토의 럭키아이템 상자'를 한참을 더 뒤적거렸다. 


-...저기 신쨩, 부탁이 있는데~ 

-거절한다.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시덥잖은 용건일 게 뻔하다는 거다. 

-너무해! 이거 말야. 이거, 필요없으면 나 주면 안돼? 


타카오는 박스 가장 밑에 들어있던 물건을 집어들었다. 마코토가 처음으로 샀던 럭키아이템인 주황색 머리방울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무줄이 다 삭아서 쓸 수 없어 보였다. 


-그런 걸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동생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고무줄은 갈아서 쓰면 될거고. 


미도리마는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 잡화점에서 산 색깔별 머리방울이 있으니 굳이 쓸 수도 없는 물건을 보관하는 건 공간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다는 거다. 

-어... 진짜 내가 가져도 돼? 


그의 선선한 대답에 오히려 타카오가 놀란 듯했다. 


-네가 먼저 달라고 해놓고는 그 반응은 뭐냐는 거다. 

-혹시 유치원 때 미국으로 이사간 첫사랑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머릿방울인가 했는데~? 

-묘하게 구체적인 망상이군. 그런 물건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라고 한 거냐. 

-신쨩이 안된다고 하면 그 틈을 타서! 들려주세요~ 머릿방울에 얽힌 신쨩의 새콤달콤한 첫사랑 이야기!! 하고 조르려고 했지? 

-...하여튼 경박한 녀석이란 거다. 

-근데 진짜 아냐? 첫사랑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었던 여자애가 떨어트린 거라든가, 열 살이 되던 해 봄에 꽃다운 소녀가 신쨩에게 고백하면서 저 대신으로 생각해주세요~하고 쥐어준 거라든가, 

-내가 쓰던 거란 것이다. 


내버려두면 한없이 떠들 기세기에, 미도리마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박장대소를 하는 타카오를 보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하하하!! 신쨩이, 신쨩이 머리방울...!! 뭐야, 어릴때 머리 길었었어? 아까 그런 사진은 못 봤는데?! 

-시끄럽다는 게야. 그리고 도대체 남의 사진은 언제 봤냐는 거다. 

-그럼 사과머리? 막 양갈래 이런 것도? 여기 있는 머리끈 다 직접 썼던거?! 으하하하! 

-그만 웃으란 거다! 


미도리마는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끅끅거리며 웃는 타카오의 뒷덜미를 잡고 다락방 밖으로 몰아냈다. 문앞에 주저앉아서도 한참을 웃던 타카오는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채 다 늘어진 머리방울을 흔들어보였다. 


-아...진짜 엄청 웃었네... 어쨌든 고마워, 신쨩! 



지잉, 하고 작게 핸드폰이 우는 소리에 미도리마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From: hawks_eye_1121@c.vodafone.ne.jp 

Subject: 真ちゃ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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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미안! 늦잠자서 좀 늦었어www 

이제 곧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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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신쨩'이라고 읽어내린 글자를 거듭 눈에 담았다. '마코토쨩'인가. 타카오와 마코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추리는 완전히 빗나간 셈이었다. 오늘의 약속은 유효했고, 타카오와 마코토는 주말에 따로 약속을 잡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그와 타카오 사이에 농구를 뺀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남는다는 것인가. 설마... 하지만 미도리마의 고민은 현관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재촉당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 

"......" 


당연히도 문 너머에 있는 것은 타카오였다. 미도리마는 오늘따라 묘하게 조용한 타카오를 응시했다. 그가 기억하는 타카오는 주로 위를 올려다보는 얼굴이었다. 신쨩, 이라는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며 올려다 볼 때 살짝 커지는 그의 눈매를 퍽 좋아했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바라본 타카오는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이것 역시 나쁘지는 않았다. 너는 마코토와 어떤 관계일까. 미도리마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 응시하던 타카오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푸핫!!" 

"...?!" 


타카오는 폭소를 터트리며 문 앞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웃는 거지? 그가 기억하던 평소의 마코토와 다른 부분이 있었던 건가? 당황한 미도리마를 앞에 두고 한참을 큭큭거리던 타카오는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아~ 미안미안."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싱글거리는 그에게 무어라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으나, 미도리마는 인내심을 발휘해 입을 꾹 다물었다. 타카오의 입에서 마코토와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면 그에 맞춰 적당히 대꾸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카오가 입을 연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신쨩이랑 너무 닮아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지 뭐야. 친동생보다도 더 닮았네... 혹시 신쨩 사촌동생이라든가 친척? 우선 신쨩 좀 불러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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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마 씨... 맞져? 아오미넷치랑 같은 반인." 


복도를 걸어가던 그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키세였다. 


"그렇다만, 무슨 일이냐는 거다." 

"아오미넷치 좀 불러주시겠슴까? 오늘 ○○ 중학교랑 연습시합이 있어서 지금 출발해야 할검다." 


○○ 중학교와의 연습시합이라면, 원래는 신타로가 2군 멤버들과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시합이었다. 신타로가 없는 이쪽에서는 아오미네가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미도리마는 책상에 엎드려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있는 아오미네의 등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쉬고, 키세에게 가볍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잠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의 성별이 바뀌면 그를 둘러싼 세계 역시 변했다. 

미도리마 마코토는 테이코 여자 농구부 주장이다. 마코토는 남자 농구부 1군들과 경기를 같이 하거나 친분을 쌓을 만한 계기가 없었다. 따라서 키세는 신타로를 미도리맛치라고 부르며 멋대로 친한 척을 하지만, 마코토와는 이름과 얼굴을 겨우 아는 정도인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쿠로코, 무라사키바라나 하이자키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같은 반인 아오미네에게 마코토는 귀찮은 잔소리쟁이 여자 정도로 인식되는 듯했고, 오히려 아오미네를 보러 자주 반에 드나드는 모모이와는 같은 성별이어서인지 신타로보다도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서 와, 미도리마." 

"늦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걸. 앉아." 


신타로와 마코토가 크게 다르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는 아카시 정도였다. 마코토 역시 학년 부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취미가 장기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가끔 방과 후 빈 교실에서 대국을 하곤 했다. 


"미도리마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역시 아까워." 


차의 행보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냐는 거다." 

"여자 중에선 독보적으로 큰 키에, 슛의 정밀도와 기술, 그리고 플레이 센스도 결코 빠지지 않지. 만약 네가 남자였다면, 그래서 남자 농구팀에 들어왔다면 우리 팀은 더욱 완벽해졌을텐데." 

"......" 


미도리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다음 수를 두었다. 그 완벽한 팀을 이미 미도리마는 알고 있었다. 아카시는 포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여자농구에서는 널 상대할 수 있는 선수가 많지 않지. 거의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맞으려나. 그렇게 승리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면, 네가 농구에 흥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걸."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장군이야. 아카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미도리마의 왕에게 단호한 사형선고를 내렸다. 미도리마는 한참 장기판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패배를 인정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게야." 

"기대하고 있을게,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나간 교실에서 혼자 장기말을 정리하다, 얼마 전 있었던 연습시합 후 옷을 갈아입던 아오미네의 시시하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한심한 녀석. 미도리마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의 작은 승리에 취해 인사를 다하지 않는 녀석은 그 정도 그릇밖에 되지 않는 녀석이란 거다. 승리를 위하여 노력을 하는 것은 인사, 그 노력이 승리로 이어지는가는 천명의 영역이었다.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 그것은 신타로일 때든 마코토일 때든 변하지 않는 그의 신조였다. 흩어진 장기말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미도리마는 치맛단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고녹파는 K ‏@epeseir  8월 18일

미도리마 신타로가 있는 기적의 세대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없는 기적의 세대.

균열은 그의 존재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벌어졌다.


이렇게 테이코의 붕괴를 정말 '방관자'인 마코토의 입장에서 바라본 미도리마가 쓰고 싶었으나 실력이 부족하여 이만 줄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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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로, 미도리마는 그 나이 또래 남자들이 가지고 있을 여체에 대한 환상이나 흥미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여자가 됐을 때 자기 걸 보면 된다는 것이다. 지극히 건전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 호기심을 풀어 버린 미도리마는 곧 그런 화제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오미네와 키세가 가져온 그라비아 잡지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 이 중에서 누가 제일 좋슴까? 

-...다들 가슴이 크군. 

-당연하지! 가슴 작은 여자 같은 거 벗겨봐야 재미없다고. 

-아오미넷치, 그 얘기 여자애들한테 하면 맞아죽을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잡지를 팔락이던 키세는 무덤덤한 미도리마의 안색을 살폈다. 


-근데 미도리맛치... 이거 봐도 아무 느낌이 없슴까? 

-느낌이고 뭐고, 이런 걸 왜 보는지 모르겠다는 게야. 

-미도리맛치... 혹시 그, 뭐냐...고, 고자? 하여튼 무슨 문제있는 거 아님까?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키세를 보며 미도리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난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쟤가 여자에 대해서 뭘 알겠냐. 이런 잡지는커녕 만화도 한 번도 본 적 없을걸? 

-하긴 미도리맛치니까여... 


미도리마는 순간 울컥해서 입을 열었다. 


-여자의 벗은 몸 같은 건 실제로도 얼마든지...! ...윽.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곧 입을 다물었지만, 아오미네와 키세는 이미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흥, 센 척은. 

-오오, 미도리맛치 어른같슴다! 혹시 벌써 해본검까?!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대담함다... 

-하아... 난 먼저 가겠다는 거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들어올렸다. 다른 쪽으로 이상한 오해를 사 버렸지만, 불능이니 고자니 하는 억울한 누명은 어찌어찌 벗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본 유일한 벗은 여자가 자기 자신이란 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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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에 맞춘 알람이 귓전을 시끄럽게 울렸다. 미도리마는 오른손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눌러 끈 후, 협탁 위의 안경을 집어서 쓴다. 그리고는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온 손등을 바라본다. 희고 가는 손가락 끝에 깔끔하게 손질된 손톱을 보며, 미도리마는 익숙해진 이질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아침은 철저한 의식처럼 거행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오른팔을 짚고, 바닥에 먼저 딛는 발은 왼쪽이다. 무슨 옷이든 단추를 풀 때는 맨 위부터, 채울 때는 맨 아래부터. 방에서 나갈 때 손잡이는 오른손으로 돌리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오른발로 시작해서 왼발로 끝나도록. 


"좋은 아침입니다." 


받아줄 사람이 없어진 인사를 빈 의자를 향해 건네며, 미도리마는 왼손으로 의자를 빼서 앉았다. 된장국과 밥, 구운 조기와 TV 리모콘 옆에는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메모가 있었다. 


[데워서 먹으렴! 우유는 냉장고에 있단다 -엄마] 


얼마 전 여동생이 소학교를 조금 먼 곳으로 가게 되며 미도리마의 일상에도 작은변화가 생겼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부모님이 차로 등교를 시켜주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나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침 인사 역시 그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기에, 아무도 없는 의자에 인사를 한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미도리마는 오른손으로 리모콘을 집어 TV를 켰다. 


[OO월 XX일의 오하아사~!] 


젓가락을 움직이며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다. 그는 이미 오늘 자신의 순위는 알고 있었다. 12위. 


[오늘의 12위는...안됐네요~ 게자리인 당신! 당신이 모르는 사이 소중한 친구에게 상처를 줘버릴지도?! 방심하지 말고 조심, 또 조심! 오늘 게자리인 당신의 럭키플레이스는 물이 많은 곳이나 농구 코트! 럭키아이템은...] 


소중한 친구? 그가 지금 친분이 있는 상대는 아카시 정도였다. 그가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지. 식사를 마친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오하아사의 내용을 머리에 새기며 그릇을 개수대에 넣었다. 럭키아이템이 이미 구비하고 있는 물건 중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역시 최하위인만큼, 가장 큰 걸 써야겠지. 오늘 경기는 나가지 않겠다고 미리 말해둬야겠다. 그리고 자율연습을 하고... 학교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미도리마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종교의식과도 같은 아침 일과는 현관문을 밖에서 잠근 후 두 번 문고리를 돌림으로 완성된다. 찰칵, 찰칵. 이러한 일과의 반복 속에서 그는 그가 언제 어디서라도 변함없는 자기 자신임을, 미도리마 신타로임을 다시 한 번 새긴다. 


"안녕, 미도링!" 


교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분홍 머리의 미소녀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걸었다. 미도리마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난한 인삿말로 대꾸했다. 


"...좋은 아침, 모모이." 

"오늘 럭키아이템은 뭐야? 아무 것도 안 들고 있네." 

"토끼 머리핀이란 것이다." 

"아, 어쩐지 두 개나 하고 있더라니~ 귀엽다! 잘 어울려!" 


모모이의 칭찬에 미도리마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머리에 달려 있던 주먹만한 토끼 마스코트 두 마리와 어깨에 닿게 기른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모모이는,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라며 미도리마의 손목을 잡았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늦겠어 미도링, 빨리 가자!" 

"뛰지 않아도 충분히 지각은 하지 않는다는," 

"빨리! 지금 가야 테츠랑 마주칠 수 있단 말이야!" 

"쿠로코랑 마주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쉬며 그를 잡아끄는 모모이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스커트 자락이 바람을 타고 무릎 언저리를 스쳤다. 


지금의 그는 기적의 세대의 슈팅가드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닌 미도리마 마코토, 중학 여자농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고 불려지는 테이코 여자농구부의 주장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미도리마 신타로는 가끔 여자가 되곤 했다. 

변하는 것은 그의 신체만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상이 그가 태어날 때부터 여자였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변해 버렸다. 이 현상은 자주는 일 주일에 서너 번, 뜸하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발생했다. 발생하는 원인을 모르니 막거나 피할 방법도 없었다. 길어도 이틀 이상 지속된 적은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가 처음 이 이상현상을 눈치챈 건 유치원 때였다. 


-엄마, 오늘은 치마 입고 갈래요. 

-어머나 신타로, 치마는 여자애들이 입는 거란다. 

-그렇지만 어제는 입었잖아요. 

-어제도 이 멜빵바지를 입었는걸? 

-아닌데... 어제 핑크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신타로, 혹시 꿈을 꾼 것 아니니? 신타로는 남자아이라 핑크색 원피스가 없단다. 


그 전까지 미도리마는 막연히 자신의 이름이 두 개라고만 생각했다. 자주 불리는 이름과 가끔 불리는 이름. 

하지만 언어화된 기억과 개념이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자라가며, 미도리마는 점점 둘의 차이를 알아가게 되었다. 

'신타로'와 '마코토'는 둘 다 부모님과 그랜드피아노와 자신의 방과 백과사전이 있었지만, 

'마코토'는 '신타로'의 경찰차 변신 로봇과 장난감 칼이 없었으며, 

'신타로'는 '마코토'의 핑크색 원피스와 리본 달린 에나멜 구두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타로'에게는 '마코토'에게 없는 신체기관이 있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결정적인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로부터도 두어 해가 더 지난 후였다. 


자신이 마코토일 때와 신타로일 때, 세상은 자신을 다르게 취급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어린 미도리마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둘은 닮았지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인물로, 가끔 서로의 정신이 바뀐 채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미도리마는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마코토'에게 메시지를 남겨 보기로 했다. 


[미도리마 마코토 씨 

안녕하세요. 미도리마 신타로라고 합니다. 저는 가끔 마코토씨가 되곤 합니다. 그 동안 마코토씨도 제가 되어 생활하고 있나요? 이 편지를 보면 답장 주세요. 

미도리마 신타로 씀] 


최대한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는 두 번 접어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올려 놓았다. 하지만 그 뒤로 그가 몇 번이고 마코토와 신타로를 오가는 사이, 그쪽에서는 어떠한 답장도 오지 않았다. 그가 마코토의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도 늘 그대로였다.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신타로'뿐이었던 것 같다는 쪽으로 가설은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쯤해서 미도리마는 자신이 마코토였던 사이 신타로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부모님이나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께 물어보면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피아노 강습을 듣고 자습을 했다는 대답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마코토로서 생활하는 동안, 신타로는 자신의 평소 생활패턴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언제나의 패턴을 만들어 그가 '없는' 사이 발생할 사건들을 쉽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것은 신타로와 마코토, 몸도 모습도 이름도 다른 두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인격으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삶에 최소한의 일관성을 주고자 하는 그의 무의식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그날부터 미도리마는 신타로와 마코토를 위한 규칙과 의식을 만들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나이트캡을 쓰고 자기, 현관문을 나설 때는 꼭 오른발부터 딛기 같은 작은 생활습관부터 통일성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 약속한 일은 꼭 지키도록 노력하기, 무슨 일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하지만 그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운에 맡기기 같은 큰 신조를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신조를 '진인사대천명'이라는 한 마디로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가 막 12세가 된 어느 여름날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진 그날, 그는 마코토였다. 그 달 들어 벌써 다섯 번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여자가 되었다 남자가 되었다 하는 걸까. 이 현상에는 무슨 규칙성이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을 반복하며 식사를 하던 그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틀어놓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ㅁㅁ월 ㅂㅂ일의 오하아사~! 오늘의 별자리 순위를 전해 드려요! 오늘의 5위는 양자리인 당신!] 


"오하아사...?" 

"별자리 운세를 말해주는 방송이란다. 마코토는 처음 보는 거겠네."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리니, 각 성좌를 상징하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화면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어느새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TV화면을 응시했다. 


[오늘의 12위는... 안타깝네요, 게자리인 당신!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앞이 보이지 않는 시기! 하지만 걱정 마세요~ 진인사대천명이란 말도 있잖아요? 럭키아이템인 주황색 머리방울을 준비하면 행운이 올라간답니다! 럭키플레이스는 공원!] 


게자리, 12위. 아이들 사이에서 별자리 궁합이 유행하는 바람에 자신의 별자리가 게자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 날 이후 오하아사라는 방송을 매일같이 챙겨보며 게자리의 순위를 체크했다. 그 결과, 게자리가 12위인 날 반드시 자신이 마코토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마코토인 날은 무조건 게자리가 12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마코토든 신타로든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지 않았던 날은 게자리의 운세가 하위권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의 삶의 의식에는 '오하아사를 매일 확인하기', '그날의 게자리 럭키아이템을 챙기기'가 추가되었다.

Posted by Info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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