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하아사 신자의 평범한 일상 - 조각글3
"......"
미도리마가 슈토쿠에 들어온 뒤 6개월이 흘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자신의 체질이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미도리마는, 못 본 사이 훨씬 길고 여성스러워진 마코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타카오와 농구화를 사러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이었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그와 타카오 사이에서 농구를 뺀다면 주말에 사적인 용무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카오 녀석은 쓸데없이 붙임성이 좋았으니 테이코 때의 아오미네와 마코토의 사이보다는 조금 나은, 등하교 인사를 나누거나 타카오 쪽에서 시덥잖은 농을 걸어오는 사이겠지. 하지만 그 정도였다. 미도리마의 인간관계는 테이코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구라는 활동을 걷어내고 나면 이다지도 얄팍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도. 미도리마는 허탈감을 애써 떨쳐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도리마 신타로와 미도리마 마코토.
두 개의 세상을 오가는 삶이 익숙해진 그에게 상식이란 것은 무척 힘든 개념이었다. 자신의 일상이 타인의 비일상이며, 자신의 평범이 타인의 비범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우치게 된 후 언제나 그를 괴롭히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의 모든 삶이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미도리마는 그의 마음 속 비밀기지인 다락방을 찾곤 했다. 볕이 잘 들지 않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창고로 쓰던 다락은 미도리마의 럭키아이템이 차곡차곡 쌓이며 작은 신전이 되었다.
"...윽."
어제까지만 해도 편하게 손이 닿았던 곳이 너무나도 높았다. 6개월 사이 마코토와 신타로의 신장 차이는 더욱 벌어진 모양이었다. 미도리마는 작은 상자를 발판으로 딛고서야 색이 바랜 토끼 귀가 삐죽하니 솟아 있는 상자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연한 주황색을 띤 골판지 상자 안에는 마코토가 사용한 럭키아이템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곳만큼은, 정확히는 이곳에 있는 럭키아이템만큼은 신타로와 마코토의 것이 공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신타로의 럭키아이템 창고에서 마코토가 구한 럭키아이템을 발견한 후, 그는 마코토로서의 삶이 실존했다는 증거로서 일기나 사진 같은 걸 남겨보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 남을 수 있는 건 오직 마코토가 산 그날의 럭키아이템뿐이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들어온 타인은 타카오뿐이었다. 몇 주 전 역사 숙제를 보여달라며 막무가내로 미도리마 가에 쳐들어온 그는, 미도리마의 '인사를 다 해서 스스로 하라는 것이다'라는 완강한 거부에 부딪쳐 치사해 신쨩-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는 곧 숙제는 포기한 것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도리마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집 진짜 넓네. 막 신쨩 방만 세 개 있다든가?
-타카오, 숙제에 집중하도록. 그리고 두 개라는 것이다.
-푸핫! 역시 하난 아니었던 거잖아! 여동생까지 있으면서 자기 방이 두개라니 럭셔리하네~ 혹시 하난 럭키아이템 방이라든가...
-......
-...진짜? 지인짜?
타카오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미도리마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가 알 바가 아니라는 거다.
-흐응, 그래~?
타카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2층 구석방은 핑크색 문패가 붙어 있었으니 동생 방일거고.
-앉으라는 것이다, 타카오.
-1층은 서재랑 안방이었지?
-그건 또 언제 봤냐는 게야.
-호크아이를 얕보지 말라구? 아까 보니까 화장실 옆에 올라가는 계단 있던데, 다락방일까나?
-애초에 왜 남의 방을 보고 싶어하는...
-오케이! 목표는 3층, 신쨩의 럭키아이템 창고! 타카오 카즈나리, 출격!
-...타카오오오!!
미도리마는 문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간 타카오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가 계단을 채 올라가기도 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타카오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는 머리를 짚으며 다락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카오는 쌓아올린 럭키아이템 사이를 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오, 이건 입학식날 가져왔던 곰인형이네? 이건 전에 카이조 전에 가지고 왔던 거고. 푸힛, 이건 또 뭐야?!
-아프리카에서 공수한 얼룩말 조각이라는 게야.
-이걸 구하려고 아프리카까지 간 거야?!
-선후관계가 틀렸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의료봉사에 따라갔다가...
-잠깐, 이 원숭이...완전 웃기게 생겼어...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란 것이다!
몸을 떨어가며 웃던 타카오는 좀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분명 저 안쪽에는...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가볍게 제지했다.
-타카오, 그쪽엔 깨지는 물건들이 많다는 거다.
-괜찮아괜찮아~ 조심하고 있다구.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던 타카오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혔다. 미도리마는 불안한 예감에 손을 뻗어 그를 살짝 잡아당겼으나, 이미 늦었다.
-우와 신쨩...이런 것도 럭키아이템이야?
-...! 내놓으란 것이다!
타카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화려한 속옷이 럭키아이템이었던 날 마코토가 직접 착용했던 브래지어와 팬티였다. 미도리마는 당황해서 그의 손에서 속옷을 낚아챘다. 타카오는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거의 울 기세로 꺽꺽거리며 웃고 있었다.
-푸히히, 그게, 그렇잖아, 으하하하, 신쨩이 저 속옷을, 막 고르고 계산하고, 히힉
-그만 웃으라는 것이다!
-설마, 진짜 입지는... 풉, 않았겠지?
미도리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닥치라는 것이다, 타카오!!
-하아...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웃음을 겨우 그친 타카오는 숨을 고르며 '마코토의 럭키아이템 상자'를 한참을 더 뒤적거렸다.
-...저기 신쨩, 부탁이 있는데~
-거절한다.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시덥잖은 용건일 게 뻔하다는 거다.
-너무해! 이거 말야. 이거, 필요없으면 나 주면 안돼?
타카오는 박스 가장 밑에 들어있던 물건을 집어들었다. 마코토가 처음으로 샀던 럭키아이템인 주황색 머리방울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무줄이 다 삭아서 쓸 수 없어 보였다.
-그런 걸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동생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고무줄은 갈아서 쓰면 될거고.
미도리마는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 잡화점에서 산 색깔별 머리방울이 있으니 굳이 쓸 수도 없는 물건을 보관하는 건 공간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다는 거다.
-어... 진짜 내가 가져도 돼?
그의 선선한 대답에 오히려 타카오가 놀란 듯했다.
-네가 먼저 달라고 해놓고는 그 반응은 뭐냐는 거다.
-혹시 유치원 때 미국으로 이사간 첫사랑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머릿방울인가 했는데~?
-묘하게 구체적인 망상이군. 그런 물건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라고 한 거냐.
-신쨩이 안된다고 하면 그 틈을 타서! 들려주세요~ 머릿방울에 얽힌 신쨩의 새콤달콤한 첫사랑 이야기!! 하고 조르려고 했지?
-...하여튼 경박한 녀석이란 거다.
-근데 진짜 아냐? 첫사랑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었던 여자애가 떨어트린 거라든가, 열 살이 되던 해 봄에 꽃다운 소녀가 신쨩에게 고백하면서 저 대신으로 생각해주세요~하고 쥐어준 거라든가,
-내가 쓰던 거란 것이다.
내버려두면 한없이 떠들 기세기에, 미도리마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박장대소를 하는 타카오를 보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하하하!! 신쨩이, 신쨩이 머리방울...!! 뭐야, 어릴때 머리 길었었어? 아까 그런 사진은 못 봤는데?!
-시끄럽다는 게야. 그리고 도대체 남의 사진은 언제 봤냐는 거다.
-그럼 사과머리? 막 양갈래 이런 것도? 여기 있는 머리끈 다 직접 썼던거?! 으하하하!
-그만 웃으란 거다!
미도리마는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끅끅거리며 웃는 타카오의 뒷덜미를 잡고 다락방 밖으로 몰아냈다. 문앞에 주저앉아서도 한참을 웃던 타카오는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채 다 늘어진 머리방울을 흔들어보였다.
-아...진짜 엄청 웃었네... 어쨌든 고마워, 신쨩!
지잉, 하고 작게 핸드폰이 우는 소리에 미도리마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From: hawks_eye_1121@c.vodafone.ne.jp
Subject: 真ちゃ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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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미안! 늦잠자서 좀 늦었어www
이제 곧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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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신쨩'이라고 읽어내린 글자를 거듭 눈에 담았다. '마코토쨩'인가. 타카오와 마코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추리는 완전히 빗나간 셈이었다. 오늘의 약속은 유효했고, 타카오와 마코토는 주말에 따로 약속을 잡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그와 타카오 사이에 농구를 뺀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남는다는 것인가. 설마... 하지만 미도리마의 고민은 현관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재촉당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
"......"
당연히도 문 너머에 있는 것은 타카오였다. 미도리마는 오늘따라 묘하게 조용한 타카오를 응시했다. 그가 기억하는 타카오는 주로 위를 올려다보는 얼굴이었다. 신쨩, 이라는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며 올려다 볼 때 살짝 커지는 그의 눈매를 퍽 좋아했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바라본 타카오는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이것 역시 나쁘지는 않았다. 너는 마코토와 어떤 관계일까. 미도리마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 응시하던 타카오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푸핫!!"
"...?!"
타카오는 폭소를 터트리며 문 앞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웃는 거지? 그가 기억하던 평소의 마코토와 다른 부분이 있었던 건가? 당황한 미도리마를 앞에 두고 한참을 큭큭거리던 타카오는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아~ 미안미안."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싱글거리는 그에게 무어라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으나, 미도리마는 인내심을 발휘해 입을 꾹 다물었다. 타카오의 입에서 마코토와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면 그에 맞춰 적당히 대꾸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카오가 입을 연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신쨩이랑 너무 닮아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지 뭐야. 친동생보다도 더 닮았네... 혹시 신쨩 사촌동생이라든가 친척? 우선 신쨩 좀 불러줄래?"